이미 벌어진 일을 직원 탓으로만 몰아세워선 곤란

“내 그럴 줄 알았어, 처음부터 엄청 민감하더라고”
“틀니는 불편할 수 있다고 설명 하라고 했지”
올 때마다 밥을 못 먹는다. 위가 안 좋다. 진료 받을 때 마다 소독 냄새가 난다고 불평할 때부터 알아봤단다. “내가 다 상담 할 수도 없고, 어떻게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 했어?”
부분틀니로 했다가 불편하니 임플란트로 다시 해달라는 환자를 두고 하는 원장의 볼멘소리다.

환자는 틀니가 잘 안 맞고 불편해서 못쓰겠으니 임플란트로 하고 싶다고 한다. 만든 틀니를 버리고 다시 임플란트로 식립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틀니는 안 사용하니 이미 수납한 금액을 임플란트 비용으로 정산 하자고 하니 원장 입장에선 화가 날 만도 하다.

환자는 틀니 경험을 처음 하니 불편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틀니의 불편함이 충분히 설명됐다고 해도 경험하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환자가 치료 받을 때마다 많이 민감해 했으니 틀니가 완성되기 전에 한 번 더 작은 음식물 하나에도 민감한 입속 상황을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또한 틀니는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전혀 다른 대안이 없을 때 하는 것이라고 재상담 하는 게 필요했다.

친구들은 잘 적응해서 사용해도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점을 다시 설명하고, 실제 틀니 하기로 했다가도 적응 못하고 임플란트로 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강조하는 게 좋았다. 마음은 있지만 비용 때문에 틀니로 하겠다고 하는 통에 너무 안이하게 상담했는지도 모르겠다.

원장도 이해된다. 열심히 진료했는데 비용도 제대로 못 받고, 환자불평은 불평대로 듣고 진료를 다시 해야 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그렇다고 직원에게 ‘그럴 줄 알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럴 줄 알았다면 미리 얘기해주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럼 틀니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고,  환자도 고생을 덜 했을 게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환자와 이런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환자는 기본적으로 스텝 말보다 원장의 말에 더 높은 신뢰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여 본인이 직접 열심히 진료해 놓고, 문제가 생기자 직원에게 ‘그럴 줄 알았다’고 비난을 하면 앞으로 어느 직원이 소신껏 상담에 나설 수 있을까.

직원은 겉으론 표현 못해도 속으론 ‘이런 결과를 미리 예상하셨으면 원장님이 직접 한번 더 설명 해주시지’라고 하소연 할 것이다.

우리는 결과가 이미 분명하게 나와 있는 현상에 대해서 너무 쉽게 단정 짓는 경우가 있다. 예컨데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식기 마련이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 ‘그거야 당연하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잖아’라고 쉽게 받아들인다. 반대로 ‘서로 떨어져 있으면 애정이 더 깊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면 ‘당연하지, 서로 떨어져 있으면 그리움이 커지니 애정이 쌓여가는 거지’라고 한다. 이처럼 전혀 반대되는 개념에도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당연한 것을 왜 연구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현재시점의 틀에 끼워 맞추어 버리기 일쑤다.

이미 일어난 일을 당연시하며 그 일이 처음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말할 때는 현재 프레임에 끼워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일이든 그때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그럴싸한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정말 원장은 사전에 알고 있었을까. 틀니를 못 쓰겠으니 임플란트로 다시 해달라고 요구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으니 조금은 예견 되었다 해도 환자가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알았다면 처음부터 틀니제작은 하지 말았어야만 했다. 환자에게 틀니는 불편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단호하게 임플란트 시술로 설득하는 상담이 필요했다.

일이 벌어진 후에 그럴 줄 알았다고 직원을 타박하기 전에 스스로 자문해보는 게 우선이다. ‘난 정말 이럴 줄 알았을까’라고 말이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틀니 상담할 때는 환자의 기대치를 계속 낮추는 설명이 필요하다고 직원들의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게 지혜로운 치과경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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