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은 충치의 ‘충’자는 꺼내지도 않았다고 윽박지르는 이유

“나를 바보로 아느냐, 뭐 이따위 병원이 있어” 대기실이 소란스럽다.

“이건 엄연한 과잉진료야”

“의사는 충치의 ‘충’자도 꺼내지 않았다고, 당신이 뭔데 치아를 씌워야 한다는 거야”

건장한 50대 남자의 목소리는 대기실을 넘어 진료실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응대하던 직원들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언성 낮추고 얘기하자고 달래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에도 “차트 복사하고, 당신이 얘기한 그대로 적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라며 상담실장에게 삿대질하며 윽박질렀다. 불평은 한번 시작하면 그 끝을 봐야 하는 것이다.

다짜고짜 신고하겠다고 난리치는 환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다. 원하는 대로 해드릴 테니, 일단 언성을 낮추고 얘기해보자며 겨우겨우 달래서 자초지종을 들어 봤다.

의사는 하악 오른쪽 어금니가 덴틴이 노출되어 다시 떼우는 게 좋다고 했는데, 의사가 환자를 진료할 때 옆에 있지도 않았던 실장이 상담을 하면서 2차 충치가 있어 다시 씌우던지 떼우던지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고 환자는 주장했다.

환자는 어찌 충치의 ‘충’자도 들은 적이 없는데 충치 때문에 씌워야 한다고 상담을 하니 ‘과잉진료 아니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던 모양이다.

환자는 일부치과서 상담실장이 매출을 위해서 과도하게 상담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런 일을 자신이 당할 줄은 몰랐다며 한참을 씩씩대고 있다. 알아볼 만큼 알아보고 진료를 잘 한다고 해서 왔는데 사기당하는 느낌이라며 감정을 자극한다. 정말 억울했는지 충치의 ‘충’자도 듣지 못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의사가 치료계획을 세우고 진료의 당위성을 설명해주고 비용 상담까지 하게 되면 비효율적이니, 스텝이 상담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정서다. 그러나 치료의사의 말과 상담실장 말이 서로 다를 경우에는 자칫 과잉진료로 오해받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의사가 진료계획을 세우고 환자한테 설명한 내용을 스탭은 주의 깊게 듣고 상담에 나서야 한다. 떼우는 것과 씌우는 것의 차이는 명확하고, 떼우는 것으로 안 될 수도 있어 씌우는 것까지 설명했다고 한들, 환자 입장에서는 구구절절한 변명일 뿐이다. 자기변명은 오히려 환자를 더욱 화나게 하는 요소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바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이나 의견, 주장에 대해서 이해되고 나 또한 그러한 생각이 드는 마음이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도 나의 입장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환자 입장에선 같은 설명이 아닌데, 어찌 치료 과정과 결과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의 주장이 환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내가 환자의 입장을 공감하지 못한 것과 같다. 말에는 많은 감정이 내포되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내뱉은 말들을 합리화시키기 시작하면 결코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 특히 불평으로 언성이 높아진 경우라면 열쇠가 채워진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때로는 빠른 인정이 더 필요하다.

“그랬군요, 그렇게 생각 하셨군요, 제가 오해 하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네요, 저의 표현방식과 설명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상황에 따라선 위와 같은 몇 마디의 말이 환자의 언성도 낮추고, 진료를 진행시킬 수 있다.

내원환자의 치료는 결국 어디를 가서든지 치료해야 한다. 또다시 다른 치과를 찾아 우리치과 욕하면서 치료하게 하는 번거로움을 준다면, 한 사람의 적만 만드는 게 아니라 수백 수천명의 안티를 나도 모르게 생산하는 것이다.

다시 깨닫는다. 처음부터 진상환자는 없다. 단지 공감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 진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볼 때다. 조금 바쁘다고 원칙을 어기지는 말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결국 공감능력은 역지사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내 입장이 타인에게도 공감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공감능력 확장은 몇 시간의 상담교육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마음의 크기도 넓히고 다양한 인물군상에 대한 이해도 필요함을 잊어선 안 된다.

저작권자 © 덴탈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